[이미지 imagery]
삶을 끝내려는(원치 않는) 자와 원치 않은 (시작하는) 생명을 품은 자.
넥타이가 매듭지어져 죽음 (혁명)을 향한 문을 만든다. 늘어진 타원형
목 매달리는 순간 그의 무게로 원이 되는 그 아침의 문
삶의 끝을 향해 열리는 문.
그 순간 문 건너편으로 보이는 탄생. 자궁의 문. 은 긴 타원형에서 동그란 원으로 팽창하여
새로운 탄생을 엎지른다.
이 두개의 문이 (눈이) 만난다 (마주친다). 밤의 끝과 아침의 시작이 만나 하나의 원을 형성한다.
[사고思考]
엎질러져 버리는 탄생은 삶이란 것에 임의로 주어진(부여된) 신성함에 물음표를 던진다.
그럼 죽음이란 것도, 선택에 의한 그 것일지라도, 하나의 사고事故 일 수 밖에 없는 것인가?
그렇다고 할지라도 선택되어진 죽음이란 우선 삶을 "받아들인" 자에게만 가능한 것이다.
즉 삶을 하나의 우연 (혹은 필연)에 의한 사고로써 단지 관성의 법칙에 의해 유지해 나가는 자들에겐, 선택되어진 죽음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죽음을 택하기 위해선 역설적으로 우선 삶을 단순한 사고가 아닌, 뜻이 있는 사건으로서 받아 들이는 결단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조]
그의 죽음은 의도도어지나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어지는 그의 "삶"은 결국 또 하나의 사고 일 뿐이다.
사고란 의도되어지지 않은 것. 그런 의미에서 그가 죽으려 했던 이유는 알 수 없으며 알려지지 않는다.
그것에 어떠한 신성한 의지는 남아있지 않다??
그런 그에게 비춰진 탄생의 사건.
그 생명은 의도되어지지 않으나 이루어져버린다.
엎질러져 버리는 것이다. 이 순간을 아침의 문의 반대 편 (즉 밤의 끝)에서 목격하는 그는
절뚝거리며 그 문의 반대편으로 이끌려 간다.
엎질러져버린 삶을 안아버린다.
자신의 결단이 부정되어짐을 흐느낀다.
[감상]
생명 자체가 갖고 있는 신성함에 대한 물음표 혹은 도전. 그 것은 대부분의 우리에게 잠재되어 있어 때때로
우릴 위협하고 우리는 위협당하며 살아간다. 또 한편 많은 이들은 그 문제를 회피하며 살아가거나 당연한 것으로 쉽게 받아들이거나 무뎌진 채 살아간다.
생명의 의미. 인생의 의미. 에 우리는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에 대한 궁극적인 표현으로써 부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선 우린 그 선택 자체도 하나의 사고事故에 지나지 않을 수 있음을 깨닫는다. 이야기의 사내처럼 죽음을 선택하지만 하나의 사고에 의해 살아남는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하나의 절망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울고 있는 방금 엎질러진 핏덩이를 끌어 안아 버리는 것이다. 생명에 대한 집착 혹은 연민의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 라기보다 의미라는 것이 있느냐 없느냐의 식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하지만 분명히 우리 모두 몸부림 치고 있는 문제에 대한 투쟁의.
한 모습을 잘 그려낸 것 같다.
우습게 들릴 지도 모르겠지만. 난 박민규라는 작가 이름을 잊은 채 읽어가면서 문체에서 그냥 동시대에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예전에 읽었던 그의 몇 작품들이 내게 내 상상 이상의 영향력을 미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문장에 그냥 하나의 동질감을 느껴버렸다. 후에 읽은 수상평에 그의 문장이 하나의 파격이었다는 것이 조금 이상했을 정도로.
아무튼 난 왜 이 박민규가 그 박민규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까??
상을 받은 작가라고 해서 왜인지 신인이라고 생각해버린건가??
어쩌면 그의 다른 작품과는 다른 무거운 분위기, 비현실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이야기, 인물 등 때문일지도.

삶을 끝내려는(원치 않는) 자와 원치 않은 (시작하는) 생명을 품은 자.
넥타이가 매듭지어져 죽음 (혁명)을 향한 문을 만든다. 늘어진 타원형
목 매달리는 순간 그의 무게로 원이 되는 그 아침의 문
삶의 끝을 향해 열리는 문.
그 순간 문 건너편으로 보이는 탄생. 자궁의 문. 은 긴 타원형에서 동그란 원으로 팽창하여
새로운 탄생을 엎지른다.
이 두개의 문이 (눈이) 만난다 (마주친다). 밤의 끝과 아침의 시작이 만나 하나의 원을 형성한다.
[사고思考]
엎질러져 버리는 탄생은 삶이란 것에 임의로 주어진(부여된) 신성함에 물음표를 던진다.
그럼 죽음이란 것도, 선택에 의한 그 것일지라도, 하나의 사고事故 일 수 밖에 없는 것인가?
그렇다고 할지라도 선택되어진 죽음이란 우선 삶을 "받아들인" 자에게만 가능한 것이다.
즉 삶을 하나의 우연 (혹은 필연)에 의한 사고로써 단지 관성의 법칙에 의해 유지해 나가는 자들에겐, 선택되어진 죽음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죽음을 택하기 위해선 역설적으로 우선 삶을 단순한 사고가 아닌, 뜻이 있는 사건으로서 받아 들이는 결단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조]
그의 죽음은 의도도어지나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어지는 그의 "삶"은 결국 또 하나의 사고 일 뿐이다.
사고란 의도되어지지 않은 것. 그런 의미에서 그가 죽으려 했던 이유는 알 수 없으며 알려지지 않는다.
그것에 어떠한 신성한 의지는 남아있지 않다??
그런 그에게 비춰진 탄생의 사건.
그 생명은 의도되어지지 않으나 이루어져버린다.
엎질러져 버리는 것이다. 이 순간을 아침의 문의 반대 편 (즉 밤의 끝)에서 목격하는 그는
절뚝거리며 그 문의 반대편으로 이끌려 간다.
엎질러져버린 삶을 안아버린다.
자신의 결단이 부정되어짐을 흐느낀다.
[감상]
생명 자체가 갖고 있는 신성함에 대한 물음표 혹은 도전. 그 것은 대부분의 우리에게 잠재되어 있어 때때로
우릴 위협하고 우리는 위협당하며 살아간다. 또 한편 많은 이들은 그 문제를 회피하며 살아가거나 당연한 것으로 쉽게 받아들이거나 무뎌진 채 살아간다.
생명의 의미. 인생의 의미. 에 우리는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에 대한 궁극적인 표현으로써 부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선 우린 그 선택 자체도 하나의 사고事故에 지나지 않을 수 있음을 깨닫는다. 이야기의 사내처럼 죽음을 선택하지만 하나의 사고에 의해 살아남는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하나의 절망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울고 있는 방금 엎질러진 핏덩이를 끌어 안아 버리는 것이다. 생명에 대한 집착 혹은 연민의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 라기보다 의미라는 것이 있느냐 없느냐의 식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하지만 분명히 우리 모두 몸부림 치고 있는 문제에 대한 투쟁의.
한 모습을 잘 그려낸 것 같다.
우습게 들릴 지도 모르겠지만. 난 박민규라는 작가 이름을 잊은 채 읽어가면서 문체에서 그냥 동시대에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예전에 읽었던 그의 몇 작품들이 내게 내 상상 이상의 영향력을 미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문장에 그냥 하나의 동질감을 느껴버렸다. 후에 읽은 수상평에 그의 문장이 하나의 파격이었다는 것이 조금 이상했을 정도로.
아무튼 난 왜 이 박민규가 그 박민규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까??
상을 받은 작가라고 해서 왜인지 신인이라고 생각해버린건가??
어쩌면 그의 다른 작품과는 다른 무거운 분위기, 비현실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이야기, 인물 등 때문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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